“10년도 더 지났는데 수업에 같은 슬라이드를 쓰고 있는 거야? 그 시간이면 책을 쓰고도 남았겠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A는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아니 내가 최선을 다하며 열심히 살았어” 그리고 A는 곧 깊은 생각에 잠기었다. 살아온 날들을 아무리 뒤돌아 보아도 한번도 제대로 쉬어 본적이 없이 달려왔는데 정작 이런 말을 듣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실제로 A는 아프지 않는한 바깥일 때문에 휴강한 적도 없었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데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살아온 날들도 중요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준비가 필요했다. 어차피 모든 것을 다 할 수 없다면 비워내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그리고 하나둘씩 비워내기 시작했다. 비우다 보면 꼭 해야만 할 일들이 더 선명하게 보일꺼라는 것을 A는 직감했다.
사실 A는 시간이 갈수록 연구를 할 수 있는 팀을 꾸리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진다는 것을 알게된다. 연구에 흥미를 느끼는 젊은 세대를 찾기도 어려웠고 그렇다고 무작정 외국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도 어려웠다. 오랜 외국경험이 독이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타국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스템에 대한 오랜 경험은 그런 시스템을 갖추기 위해서 필요한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리고 뒤에 오는 세대에 대한 기대도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혼자 가는 것보다는 함께 가면 더 멀리 갈 수 있다는 속담을 되뇌이던 시절도 그렇게 지나고 있었다. 그리고는 함께 가는 것도 사람 나름이라는 독백을 남긴다. 비워낸 자리에는 혼자만이라도 가야한다는 생각이 남아있었다.
한편으로 흥미로운 생각도 들었다. 실패한 경험과 실패한 방법을 답습하는 조직이 늘 존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쩌면 미숙함의 연속일 수도 있도 있고 어쩌면 그 조직이 할 수 있는 일이 그 정도 수준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다. 모든 일에는 사람이 중요하다. 그러나 어느 수준 이상의 일을 하려면 사람은 물론이고 좋은시스템이 필요하다. 그런데 어줍은 시스템만 있고 그 안에 제대로 된 사람이 없으면 최악이다.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자리가 사람을 망치고 시스템을 망치고 조직을 망치게 된다. 아무런 경험도 지식도 없이 자리를 차지하는 어줍은 사람들로 채워진 조직은 어줍은 시스템의 전형이다.
아직도 구석기시대에서 설계를 하고 계십니까? 그렇게 지나온 시간이면 새로운 학문을 하나 섭렵할 충분한 시간이겠다. 이름으로 학문을 가르고 이름으로 분야를 가르는 이유는 무엇일까? 건축이라는 하나의 큰 그릇에 담기고 담기지 못하는 것을 누가 정하는 것일까? 그들의 눈에는 건축이 보이지 않고 건축을 화수분으로 보는 것은 아닐까?
그림은 건물에 들어오는 햇빛의 양을 조절하는 기계장치의 일부를 모사한 것이다. 누군가 아름다운 형태로 설계를 하고 누군가는 태양의 궤적을 따라 열리고 닫히는 아이디어를 내고 또 누군가는 실내의 상태를 과학적으로 파악을 하고 그리고 누군가는 이를 움직이게 하는 기계장치를 만들게 된다. 건축의 분야에 경중이 어디에 있을까? 모두가 하나의 건축을 이루어 내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런 자격도 없이 자리만 차지하면 무엇이든 다해도 된다는 저렴한 생각을 가지고 이 사회와 나라를 이끌어 갈 수 있겠는가? 우리는 늘 수많은 보통사람의 굴곡진 삶과 노력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