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지지 않는 유리를 만들수 있어도 만들지 않는다.
차를 타고 오다 동석한 일행이 문득 A에게 한말이다. 우리사회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러하다. 문제를 진즉에 알아채고 있었고 또 해결할 방법을 알고있는데도 문제를 방치한다. 왜일까?
피아의 구분은 공정성을 상실하게 한다. 자신이 매일 하던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모두 남의 탓이고 결과와는 상관없이 나는 늘 잘못이 없다는 이상한 신념이 사회 곳곳에서 싹트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에게 불리하면 기준을 바꾸고 법을 바꾸어서 남을 괴롭히기도 한다. 사회가 건전하지 않은 체질로 변하는 징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전에는 생산의 효율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양질의 제품을 생산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고 또 생산된 제품을 적정한 가격에 많은 사람에게 분배하는 일에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생기면 늘 모든일에 누군가는 책임을 지는 모습을 보였고 그래서 사회는 어느정도 수준의 공정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보통사람은 일상을 살면 시스템을 움직이는 위치에 있는 소수가 적정한 양심을 가지고 일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모습을 보였다. 가식일 수도 있지만 최소한 그런 모습을 연출하기라도 했다. 그래서 언젠가는 깨어지지 않는 유리가 만들어 질 수 있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왜 우리사회는 점점 추한 모습으로 변해가는 것일까?
모든 일의 원인은 시작에 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보자. 누군가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일반적으로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기준에 못미치는 성취로 원하는 것을 이루었다고 하자. 일단은 누군가의 기회를 갈취한 것이고 또 우리사회가 요구하는 그 기준을 만족하기 위해 또 다른 부정한 방법을 동원할 것이다. 아마도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을 속이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며 특히 자신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또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고민할 것이다. 우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선한 가치나 공정한 기준은 더 나은 방향으로 움직이는 것이 필요한데 이러한 구성원으로 인해서 우리사회는 퇴보한다. 그래서 모든 일은 공정하게 처리되어야 한다.
최근 코로나로 인해서 국가간에 동일한 사안에 대처하는 방식이 너무도 다르다. A는 자신의 생각이 꼭 틀린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코로나는 대학의 대면강의에 대한 자유를 빼앗아 갔다. 이러한 상황은 학력의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 한국대학의 대응책은 아이러니 하게도 학생들에게 더 좋은 점수를 주게 하는 것이다. 영국의 대학은 반대로 대응하고 있다. 교육에 대한 평가기준을 코로나 전후로 같다. 따라서 비대면 강의로 강의질과 교육의 성과가 저하되면 주저하지 않고 더 낮은 학점을 부여한다. 따라서 오랜시간동안 공들여 만든 교육의 평가기준을 바꾸지 않고 교육과정을 냉정히 평가하고 문제를 보완하려고 한다. 왜 같은 상황에 다른 판단을 하고 행동을 하는 것일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