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없는 세상이 점점 더 가까워지는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지면과 방송에서 주식투자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출몰하고 있다.
사교육에 투자하지 말고 주식에 투자해서 그 성공을 자식에게 물려주라. 교묘하게 사람들을 속이는 사탕발림이다. 언뜻 보면 일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돈이 우선이 되면 그렇다. 그렇지만 자식이나 교육이 우선이 되면 이런 말은 사탕발림이다. 주위의 모든 사람을 주식시장으로 끌어들이고 대부분의 사람이 힘들게 이루어온 경제적 안정을 한꺼번에 뺏어 버리겠다는 선언이다. 사교육이라는 부정적인 언어를 주식이라는 단어에 붙여서 주식을 긍정의 편에 서게 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공존한다. 따라서 면밀하게 관찰하고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 교육이던 주식이던 다 마찬가지다. 그런데 왜 방송을 통해서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자주 보이는 것일까?
우리사회가 지금 어떤 분기점에 와 있다. 삶이 본질에서 멀어지고 물질이 영혼을 지배하는 상태로 점점 더 가까와지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태생적으로 물질에 대한 욕망이 가득한 존재이어도 사회적 시스템이 이러한 욕망을 어느 정도 제어할 수 있어야 하는데 이제는 모든 일에서 본질이 먼 나라 이야기가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진리의 탐구가 본질이 아니고 연구과제를 유치하는 방법에 골몰하고 학점을 잘 받을 수 있는 방법만 찾게 된다. 연구비 한 푼 받지 않고 더 나은 연구결과를 만들어 낸다면 얼마나 효율적인 시스템인 것인가? 그 수많은 나라의 예산을 낭비하지 말고 매년 성취하는 연구결과를 정량적으로 분석하여 연구비를 제공하는 것을 어떨까? 작금의 상황에서는 그 누구도 연구결과의 수준에 대해서 말하기 부끄러운 것 아닌가? 예나 지금이나 시대가 요구하기 때문에 이 분야가 육성되어야 한다는 참 어처구니 없는 일변에 기가 찰 따름이다. 어떤 한 분야가 가만히만 놓아두었어도 돈 한푼들이지 않고 더 발전할 수도 있는데 늘 국민의 세금을 탐하고 갈취하는 상황으로 몰아가는 것은 누구의 책임인 것인가?
국민의 세금을 물 쓰듯이 쓰고 호의호식하는 이들을 보면 양심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다. 또 국민의 세금을 쓰면서 친일을 하는 사람들은 또 어떤가? 최근 지면에서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사람도 친일파(?)라는 이상한 논리를 들이미는 사람이 있었다. 참담한 심정이다. 어떤 의도를 가지고 평소에는 아무런 이야기를 하지 않다가 필요할 때 꼭 누군가를 단죄하겠다며 험악한 분위기를 만든다. 그렇다면 친일이란 무엇인가?
일본과 가깝우면 친일이다. 사실 친일이라는 말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이미 그 말에 부정적 의도를 내포시킨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사이가 좋을 때야 친한 사람이 좋은 뜻으로 쓰인다. 그런데 사이가 나빠지면 그 사람과 친하다는 말이 욕이 될 수도 있다. 지극히 사적이다. 더 큰의미에서의 친일은 무엇인가? 조국을 등지고 일본에 충성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인가? 개인의 영달의 위해서 나라를 팔아먹는 행위가 제일 적합하다. 진짜 나라를 팔아먹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뿐만이 아니라 십시일반 나라를 팔아먹는 일에 거들고 나서는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태평성대에서도 이러한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물론 비일비재하다. 한가지 예를 들어보자. 나라가 발전하는데에는 매우 많은 부분에서 성공을 이루어야 한다. 제일 큰 부분이 교육이다. 모든 국민이 공히 높은 교육수준을 유지하고 사회적 합의를 도출할 때 지적교감을 이루어 낼 수 있다면 매우 매력적이다. 그래서 선진문물을 배우고 익히려고 유학을 시도한다. 사실 요즈음은 예전처럼 바깥으로 나가지 않아도 기회는 많다. 문제는 나가서 배우고 익힌 것에 더해서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일본의 사람들과 결탁을 하는 것이다. 그 결탁을 공고히 하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조국에 해가 되더라도 일본인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그들의 힘을 빌어 호의호식하며 살아간다면 친일이다. 그래서 누군가 “일본에 유학한 사람은 친일이다”라는 말을 꼽씹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마도 대부분 대한국민이 이러한 의미의 친일에 앞장서겠냐 만은 우리가 설마하는 사이에 많은 부분에서 드러내놓고 친일을 하기때문에 긴가민가하면서 잘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일은 고쳐지지 않는 것인가?
인간이 어떤 이익을 추구하고 산다. 물질적이라는 이야기다. 이상적인 사회가 좋기야 하지만 어차피 인간이 물질을 떠나서 살기란 쉽지가 않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물질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취하지 않으면 휘귀종으로 분류된다. 어차피 생김새던지 생각이던지 자신과 다르면 구분하려고 하는 피아의 구분법이 여기서도 자연스럽게 동원되기 때문이다. 휘귀종으로 구분되지 않으려면 서로 엮여야 한다. 좋은 방식으로든 나쁜 방식으로 든 엮어서 함께 가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인지하고도 어떤 사람은 인지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엮이게 되고 빠져 나올 수 없게 될 수도 있다. 이때 제일 나쁜 종류의 인간이 있다. 이들은 알면서도 굴비 엮듯이 사람들을 모으고 순진한 젊은이들에게 사회생활은 원래 이런거야 라는 말고 회유한다. 사실은 더 아름답게 이야기 한다. 예를 들면 이 분야의 발전을 위해서 당신과 같은 젊은이들의 노력이 꼭 필요하며 우리가 함께 하면 이 분야의 발전이 꼭 이루어진다. 이런식이다. 하지만 대부분 자세히 관찰을 하면 모두가 이익집단이다. 모임도 이익집단 그리고 개체도 이익 추구자 이다.
젊은 세대가 꿈을 잃어가고 있다. 기성세대의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미래에 대해서 바로 알려주지 않고 젊은이들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요즈음 대학졸업 예정자의 대부분이 공기업을 희망하고 있다. 젊은이들은 부모도 주위사람들도 모두 공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고 한다. 대학이라는 과정이 취업이라는 결과로 평가받고 있는 시대를 살고 있다. 하나의 인재를 키워내는 긴 여정에 대한 평가를 취업으로 하는 참 이상한 사회에 살고 있다. 그리고 대다수의 젊은이들이 한 분야의 전문가로 성장하기 위한 꿈을 더 이상 꾸지 않는다. 내가 소중하게 만들어가는 삶이 아닌 어디론가 좋은 곳으로 갈 것만 같은 큰 배에 몸을 실으려고 안깐힘을 쓰고 있다. 그 배가 어디로 향해나아갈 지도 모른채로 그렇게 몸을 싣기 위해서 안깐힘을 쓴다.
주응력이 구조물의 하중에 대한 저항방식을 이해하는 데 주는 혜안이 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늘 본질을 보려고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