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누군가를 속이기 위해서 시작한 일이 아니라고들 이야기 한다. 그러나 애초에 속이고 시작했다면 속인 것이다. 솔직히 사과를 하고 용서를 받아야 한다.
좋은 과정 없는 좋은 결과는 없다는 말도 있다. 대부분의 일들에 좋은 결과가 있다면 누군가 큰 희생을 치루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좋은 과정이 없는 결과를 자세히 들여다 보면 대부분 요행(?)이었거나 누군가의 노력을 가로챈 경우가 대부분이다.
전문가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방법은 매우 쉽다. 자세히 관찰하면 된다. 전문적인 주제로 숨어있는 진짜 전문가들을 모아 놓고 이야기를 시키면 된다. 어줍은 전문가들이 자리를 함께하고 나누는 대화는 일반인들에게는 경외로울 수 있으나 그 일을 평생해온 사람들에게는 금방 탄로가 나게 된다. 대학사회에서 어린학생들을 상대로 사기(?)를 치는 사람들이 많다. 물론 열심히 하는 분들이야 늘 박수를 보내지만 교묘하게 자신을 포장하는 이들이 생각보다도 아주 많다. 제자로 받기에 넘치면 좋은 곳으로 보내려고 몸부림치고 제자로 받기에 너무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 받지 않는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은 일들에 매달린다. 연구가 도피가 되어서는 안되고 또 시간을 뭉개는 장소가 되어서도 안된다. 진리라는 신성한 가치를 부여하는 곳 그래서 신성한 장소로 인식되는 곳이 대학이어야 한다. 어렵더라도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가르쳐야 한다. 어쩌면 꼰대라는 말을 들을 수도 있다.
오늘 신문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2주간 8개 정상회의… 오늘 새벽 정상외교 마친 뒤 연가” 매일 새벽까지 책상에 앉아서 무엇인가를 고민하고 만들어 내는 사람들도 다수다. 어쩌면 저렇게 당연히 해야할 일을 하고도 대단한 일을 한 것 처럼 이야기를 할까? 모든 호사를 누리고 퇴임후에는 일반인들이 감히 누려보지 못할 연금을 수령하게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을까? 2주간의 새벽 정상외교라. 지금 코로나로 인해서 비대면강의를 받는 유학생들도 자신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서 새벽강의를 듣고 있다. 지금같은 상황에서 당연한 일을 하고 기사로 내는 이들의 저의는 무엇일까?
우리사회의 아픈 곳을 돌볼 줄아는 이들로만 알았는데 색안경을 끼고 아픈이들 조차도 나누어서 보는 것 같아서 한편으로 가슴이 답답하다. 편견을 가지는 사람의 편협한 마음이 주는 피로함 탓인지 “내탓이오”를 말하던 한분의 추기경이 그리워지는 시절이다. 남향의 집 창가에 앉아서 들어오는 햇볕의 따스함을 느낀다. 이 추위에 바깥 일을 하고 또 바깥 활동을 하는 많은 이들에게 죄스럽기까지 한 환경이다. 그러나 밤잠을 설쳐가며 멸종위기의 가치관을 지켜내려는 이상한 행위를 뒤로하고 가끔씩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그런데 바이러스는 그마저도 자유롭게 허락하지를 않는다.
위의 그림은 막구조(membrane structure)에 이용되는 기계장치의 디테일이다. 얇은 면이 힘에 저항하기 위해서는 장력이 필요하다. 현재 우리사회도 어쩌면 올바른 방향의 장력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